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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RI 지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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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투명성 함정’에 빠진 공시규제 강화

08.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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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근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란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다. 여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고발한 영화이다. ‘여자이기 때문에’는 유행가에 자주 나오는 가사이다. 여자의 ‘숙명’을 이야기한 것이다. 뜬금없는 이야기 같지만 여기에는 진실이 숨어있다. 존재 자체가 숙명으로 간주되는 사회, 역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만연된 사회가 건강할 수는 없다. 여자 대신 대기업집단을 대입하면 어떠한가. ‘대기업집단의 계열사라는 이유만으로’ ‘대기업집단 총수의 친인척이기 때문에’가 된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규제 현실인 것이다. 앞의 이야기와 차이가 있다면 숙명 대신 ‘원죄’가 사회적 편견 대신 ‘적대적 규제’가 그 자리를 메운 것뿐이다. 우리경제가 활력을 잃은 이유를 먼 데서 찾을 필요는 없다.

작년 공정거래위원회는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에 따라 자산규모 2조원 이상의 51개 그룹 총수와 친인척의 지분내역을 범주별로 공개했다. 신중론이 대두되었지만 공정위는 지분정보 공개를 강행했다. 지분공개의 명분은 투자자의 판단을 돕고 해당 그룹에게는 소유·지배구조 개선을 유도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후적으로 볼 때, 총수 및 친인척의 지분을 일반국민에게 공개한 것이 투자자의 판단에 어떤 도움을 주었고 소유·지배구조 개선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소유·지배구조의 개선보다는 오히려 총수와 친인척이 부도덕한 존재로 비춰져 일반대중의 재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만 증폭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지분공개는 업무상 취득한 정보에 대한 비밀엄수의무와 금융거래의 비밀을 보장하는 금융실명제법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비록 실명은 공개하지 않았지만 해당기업과 당사자의 동의없이 일반국민에게 지분정보를 공개한 것은, 총수의 친인척이기 때문에 그들의 사생활은 보호되지 않아도 된다는 발상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총수를 포함한 친인척의 지분정보는 사업보고서와 감사보고서 등 현행법상 공시가 의무화된 자료에 이미 나타나 있기 때문에 투자자는 필요에 따라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이들의 지분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공정위가 굳이 이를 공개할 필요는 없었다. 공정위의 지분정보 공개의 최대 수혜자는 적대적 인수·합병을 꾀하려는 외국자본일 것으로 예측된다. 외국자본의 수고를 덜어준 꼴이다. 외국에서는 대기업 총수 친인척의 지분을 구체적으로 공개하는 사례가 없다. 외국자본에게 상세정보를 제공해 자국기업을 적대적 M&A의 표적으로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친인척 지분은 기업지배구조와 무관한 기업소유구조 측면에서 총수의 우호지분일 뿐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친인척의 지분은 특수관계인을 포함한 총수의 지분율과 더해진 ‘묶음’(block)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를 낱낱이 풀어 헤칠 필요는 없다. 결국 친인척의 지분정보 공개는 여론 형성을 위한 공공서비스 제공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작년 공정거래법개정안이 통과됨에 따라 금년 4월부터 대기업집단 소속 비상장 계열사들의 공시의무가 ‘상장사 수준’으로 강화되었다. 이번에 새로이 강화된 공시의무가 부과되는 기업은 자산2조원 이상의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소속 계열사 중 금융·보험회사를 제외한 비상장회사로 모두 6백39개에 이른다. 이들 기업은 최대주주를 비롯한 주요주주의 주식보유 현황 및 그 변동사항, 그리고 일정규모 이상의 자산 또는 주식의 취득 등 재무구조에 중요한 변동을 초래하는 사항을 공시해야 한다. 공정위의 이번 공시의무 강화 논거는, 대기업집단 소속 비상장기업들이 소수의 주주들에 의해 운영됨으로써 그 소유·지배구조나 경영활동 등이 시장에 노출되지 않아 투명성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약하면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높여 비상장사를 통한 부당지원과 지배력 확장을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비상장사가 소수의 주주들에 의해 운영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주주구성과 규율방식이 다른 비상장회사를 대상으로 상장회사와 같은 공시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시장감시를 위한 비상장·비등록 법인의 공시의무는 이미 외부감사법과 금융관련법에 규정되어 있으며, 지배주주의 ‘사익추구’를 막기 위해 특수관계인과의 거래규모가 자본금의 10% 또는 100억 이상인 경우 이사회 의결을 거쳐 그 내용을 공시토록 내부거래관련 규정이 정비되어 있다. 따라서 비상장사의 공시의무 강화는 친인척 지분공개와 마찬가지로 투명성 제고를 위해 추가적으로 기여할 여지가 많지 않다.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에 소속된다는 이유만으로 상장여부에 관계없이 공시의무가 강화된다면 이는 차별을 금하는 ‘법치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정히 비상장 계열사의 공시의무를 강화시키려면 이들 기업의 상장을 유도해야 한다. 그것이 정책순리이다.


IMF외환위기 이후 대기업정책의 골간은 경영의 투명성 제고이며, 공시제도 강화는 투명경영을 위한 주요한 정책수단이었다. 하지만 투명경영과 기업의 소유·지배구조개선 간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보공개와 공시강화를 통해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공정위의 구상은 타당성을 갖기 어렵다. 역설적으로 기업 가치는 유리한 정보보다 불리한 정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경영 투명성이 제고될수록 시장 변동성이 커지게 돼 위험회피 차원에서 투자에 소극적이 되어 기업의 잠재성장력이 저하될 수도 있다. 그리고 지나친 공시강화는 우량 비상장기업의 상장을 저해하고 우량 상장기업의 자진철수를 촉발할 수도 있다.


‘주변 변수’에 지나지 않는 친인척의 지분공개를 강행하고 비상장사 계열사에 상장사의 공시기준을 적용하는 등의 행태는 정책당국이 ‘투명성의 함정’에 함몰되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투명성 제고’와 ‘투명성 함정’이 구별되지 않는 한, 반(反)기업정서는 해소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책당국부터 대기업집단에 대한 정책인식을 바꿔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조동근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dkcho@m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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