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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RI 지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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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산업정책과 경쟁정책의 갈등

08.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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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규

근래에 들어 국내 석유화학업계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세계적인 공급과잉으로 수익성이 저하되고 있는 가운데 중동 산유국과 중국이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있고, 선진국 기업들은 수익성 개선을 위해 대형화 및 전문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업계는 범용제품 위주로 생산하고 있는 데다, 수출의존도가 높아 해외시장의 변화에 매우 민감하다. 또한 단위공장규모 및 기업별 생산능력이 작아 효율성이 떨어지고, 생산능력에 비해 업체 수가 많아 수익성이 낮다. 이에 따라 현재의 사업구조가 지속될 경우 2010년 이후 국내업체는 경쟁력을 잃고 고사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산업자원부에서는 국내 유화업계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으로 지속적인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특히, 석유화학산업이 대규모 장치산업임을 감안하여 업체간 기업결합을 통해 규모의 경제 효과를 높이고, 또한 효율성을 향상시킴으로써 경쟁력을 제고시키고 수익성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이와 같은 산업정책은 불가피하게 경쟁정책과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관련 업체간 합병이나 통폐합은 업체 수를 감소시켜 시장의 독과점화를 초래하고 업체간 담합의 가능성을 높이므로 국내시장에서의 경쟁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로 인해 석유화학제품을 원료나 중간재로 사용하는 다른 사업자나 최종소비자의 후생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경쟁촉진을 최우선 정책목표로 삼고 있는 경쟁정책 당국에서는 이러한 기업결합을 허용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이것이 현재 산업자원부가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이다.

그러나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공정거래법 제7조는 경쟁을 제한하는 기업결합을 금지하되, 효율성 증대효과가 경쟁제한의 폐해보다 크거나, 회생이 불가한 회사와의 기업결합에 대해서는 예외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공정거래위원회의 기업결합심사기준(이하 심사기준)에 따르면, 효율성 증대효과를 판단할 때 규모의 경제, 생산설비의 통합, 생산공정의 합리화 등을 통해 생산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지 여부를 고려하도록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전후방 연관산업의 발전에 기여하는지 여부,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 등 국민경제생활의 안정에 기여하는지 여부 등 국민경제 전체에서의 효율성 증대효과도 함께 고려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시장의 독과점화를 가져오는 기업결합이라 하더라도 규모의 경제효과 등 효율성 증대효과가 충분히 크고 국민경제 전체에 도움이 된다면 예외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업자원부가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술한 심사기준은 효율성 증대효과가 가까운 시일 내에 발생할 것이 명백해야 하고, 설비확장 등 기업결합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는 효율성 증대를 실현시키기 어려워야 하며, 생산량의 감소 등 경쟁제한적인 방법을 통한 비용절감이 아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유화업계에서 규모의 경제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경쟁을 제한하는 기업결합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체적인 설비확장을 통해 효율성을 높이고 경쟁력을 제고시키라는 뜻이다.

업체간 통폐합을 통해서라도 서둘러 구조조정을 추진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산업자원부의 입장에서 이와 같은 예외규정은 답답하고 까다롭기 그지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보다 훨씬 심각하다. 공정위에서는 최근 몇 년 전부터 경쟁제한적인 기업결합을 심사함에 있어서 심사기준에 명시된 국민경제 전체적인 효과를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업결합 허용여부를 현재의 심사기준보다 훨씬 엄격한 소비자후생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아예 심사기준 자체를 기존의 공익기준(기업결합에 따른 공익이 경쟁제한의 폐해를 능가하면 허용하는 방식)에서 소비자후생기준(기업결합에 따른 소비자후생증대가 경쟁제한의 폐해를 능가하면 허용하는 방식)으로 개정하려는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효율성 증대효과가 극히 소극적으로 고려되고 있고, 효율성 증대를 이유로 한 경쟁제한적인 기업결합의 예외적 허용 가능성도 거의 기대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상황이 초래된 데에는 산업자원부의 공이 크다. 산업자원부는 이른바 산업정책이라는 이름하에 시장경쟁을 저해하고 독과점화를 심화시키며 기존 사업자에게 특혜를 주는 성격의 통폐합이나 사업교환, 또는 기업결합을 여러 차례 추진해온 것이다. 그럴 때마다 산자부는 공정거래법상의 예외규정을 악용해왔고, 그 결과 경쟁정책이 허수아비로 전락하거나 헌신짝처럼 버려졌던 것이다.

이제 원점으로 돌아가자. 우선 경쟁정책이 바로 서야 한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시장규모도 커지고 경쟁기업의 수도 많이 증가하였으므로 과거와 같이 시장경쟁을 심각하게 왜곡·저해하는 방식으로 경제발전을 이루려는 산업정책적 고려는 제거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산업정책적 고려, 정치적 고려 등 경쟁 외적인 고려가 많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현재의 공익기준을 총잉여기준(기업결합으로 인해 소비자후생과 생산자 이윤의 합이 증가하면 동 기업결합을 허용하는 방식)이나 소비자후생기준으로 변경해야 한다.

다만 우리나라는 아직 국내시장이 비교적 협소하여 국내수준의 경쟁촉진만으로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고, 또한 아직 중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어 앞으로도 역동적인 경제발전을 계속 해나가야 하므로 효율성 증대효과를 보다 긍정적으로 고려하는 총잉여기준으로 우선 변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소비자후생기준은 국내 시장규모가 더 확대되고 일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 이상이 되는 시점에 도입해도 늦지 않다.

심사기준을 변경하는 것 외에도 부처간의 공식적인 그리고 공개적인 협의채널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경쟁정책과 산업정책이 충돌할 때 과거와 같이 부처간 물밑작업을 통해 음성적으로 정책이 결정되어서는 곤란하다. 우선 심사기준을 개정할 때부터 관련부처간의 공식적인 협의가 충분히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는 유화업계의 구조조정 문제에서와 같이 두 정책목표가 상충될 경우 관련부처간의 공개적인 협의를 통해 사안별로 투명하고 합리적인 조정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산업정책도 살리고 경쟁정책도 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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