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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원칙과 책임의 정치를 기대한다

  • 2010년 1월 8일
  • 5분 분량

2010년 경인(庚寅)년 새해가 밝았다. 2010년은 경술국치(庚戌國恥) 100년, 6ㆍ25전쟁 발발 60년, 4ㆍ19혁명 50년이 되는 해이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지 100년 만에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이만큼이나 발전시켰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IT와 선박제조업에서 일본을 추월하였고 세계 9대 수출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우리 정치는 4ㆍ19혁명 50년 만에 군부권위주의를 넘어서 민주주의가 정치체제의 유일한 게임방식이 되었으며 ‘경쟁적 선거를 통한 두 번의 정권교체’로 민주주의 공고화(consolidation of democracy) 단계에 진입하였다.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의 저자인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에 의하면 민주주의 공고화의 기준은 ‘경쟁적 선거를 통한 두 번의 정권교체’인데,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으로 여당-야당을 넘나드는 두 차례의 정권교체를 평화적으로 이루어냈다. 영국 의회민주주의는 1215년 대헌장(Magna Carta)에서 기원을 찾는다면 800년이 되며,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역시 그 시원(始原)을 1620년 ‘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에서 찾는다면 400여년이고 독립전쟁에서 찾는다면 200년이 넘는다. 우리는 1945년 미군정(美軍政)이 자유민주주의를 이 땅에 가져온 이래 65년 만에 이룩한 성과치고는 출중하다. 아시아에서 비교하자면 그나마 안정된 민주주의를 보이는 국가는 한국과 일본인데 천황제나 과거 자민당 일당 지배, 금권정치와 세습정치의 현실을 보면 우리의 민주주의 수준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밑에 들려오는 ‘파행 국회’ 뉴스는 민주주의 정치발전에 거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다. 매년 되풀이되는 여야의 법안과 예산안을 둘러싼 갈등, 야당의 회의장 점거, 여야 의원들의 물리적 충돌과 파행적 법안ㆍ예산안 통과는 정치에 거는 희망의 싹조차도 꺾어버린다. 문제는 의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치가 무원칙ㆍ무책임ㆍ비타협ㆍ싸움과 폭력을 일삼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언론과 방송도 여야로 편을 갈라 무원칙과 무책임에 동조하고 있다.

한 언론은 다음과 같은 원전사업 수주에 대한 비판적인 사설을 게재했다. “원전 수출은 많은 위험을 안고 있는 일종의 ‘모험사업’이다. … 원전 운영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한다면 그 타격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 ‘원전의 경제성’은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 원전 수출에 앞장서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체에너지 개발을 독려하는 대통령이 필요한 시점이다.”

원전 사고를 예상하고 원전의 경제성뿐만 아니라 원전 수주의 경제성도 신기루인 것처럼 암시하고 있고, 대통령은 외국수주 따러 출장 다니지 말라고 충고하는 식이다. ‘흠집 내기’와 ‘비판을 위한 비판’에 열중하다보니 생겨난 ‘외눈박이’ 시각 때문이다. 우리나라 원자력이 1978년 고리원자력 1호기 가동 이후 방사능 유출과 같은 안전사고가 한 차례도 없었다는 기술력을 인정받아 그러한 ‘안전성’ 때문에 수주의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원전 수주로 만들어질 청년 일자리의 수를 생각해서라도 원자력 사고를 운운하며 트집을 잡는 행동은 자제해야 했다. 정적(政敵)의 성공에 흠집을 내고 싶더라도 공동체의 밥그릇을 깨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론(正論) 언론이 갖는 신사(gentlemen)의 도리를 잊은 듯하다.

원전 수주를 “단군 이래 최대 성과”라고 치켜세웠던 한나라당도 무원칙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올해 마지막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시킨 ‘저탄소 녹색성장 기본법’에 원자력산업 관련 기술개발, 수출 진흥 등 원자력산업을 육성하는 시책 수립과 시행 그리고 원자력을 통한 안정적 에너지 공급 항목을 뺀 것이다. 녹색성장에서 원자력을 빼자는 민주당의 주장을 한나라당이 받아들인 결과였다. 도대체 한나라당은 원자력에 관하여 어떤 원칙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원전 수주는 되고 원전산업 육성은 안 되는 해괴한 무원칙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무원칙과 무책임의 정치는 여야 모두 초록(草綠)이 동색(同色)이다. 민주당은 ‘4대강 사업’ 예산을 삭감하기 위하여, 국가 전체의 예산 통과 저지를 볼모로 삼았었다. 4대강 사업을 흠집 내기 위하여 국가 전체의 살림살이가 절단이 나도 상관이 없다는 무책임한 논리이다. 국민의 정당이 아니라 공공의 적이나 할 수 있는 행위를 하고 있어도 다수당인 한나라당은 한 달 가까이 속수무책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3차례나 대운하 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국민 앞에서 약속하였고, 청와대도 4대강 살리기 사업이 ‘변형된 4대강 사업’도 아니며 대운하를 위한 전(前)단계 사업이 아님을 대변인을 통해 천명한 것에 발맞추어, 한나라당이 한 일이라고는 고작 의원총회에서 앞으로도 대운하 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뿐이다. 그리고 새 정부 회계연도 사흘을 앞두고 민주당과 합의한 것이 ‘4대강 국민위원회’이다. ‘4대강 국민위원회’를 통하여 여론을 수렴하고 국민이 참여하는 예산심의와 사업 전반에 대한 논의를 하겠다고 한다. 국회의원은 국민을 대표하며 여론수렴, 예산심의, 사업 타당성 논의 모두 국회에서 의원들이 해야 할 논의를 여야는 ‘4대강 국민위원회’로 넘기고 있다. 여(與)도 야(野)도 모두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한 정치’를 하겠다는 비겁한 정치적 합의였다. 국회에서의 논의가 국민위원회의 논의보다 못하다면 국회의 존재 이유(raison d'etre)는 없어진다.

하지만 모두 제쳐두고 우리 정치의 진정한 문제는 무원칙과 무책임의 정치 그리고 ‘4대강 국민위원회’ 설치와 같은 비겁한 합의에 있지 않다. 더 중대한 문제는 미디어 관련법, 세종시 논란, 4대강 예산문제 등 정치의 중요 사안마다 민주주의 의사결정 절차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는 사회세력 간의 분열된 의견 대립 속에서도 합의와 결론에 이르는 민주적 방식을 규정해 놓고 있다. 그 원칙은 다름 아닌 다수결(the decision of the majority)에 의한 결정이라는 절차이다.

다수결이라는 의사결정 방식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대의제 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 정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다수결은 ‘소수에 대한 배려’를 항시 함께 한다. 그 ‘소수에 대한 배려’는 설득ㆍ토론ㆍ협상을 진행하면서 ‘필리버스터링(filibustering)’이라는 의사진행 방해를 인정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 필리버스터링을 종결하고 표결하고 다수결로 가결(可決)되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다수결의 권위 때문이다.

우리 민주주의 정치는 소수의 농성과 표결 방해가 다수에 의한 의결의 절차를 무력화시키고 결과적으로는 소수 의견이 다수 의견을 압도하는 ‘소수 독재’의 상황을 일상화하고 있다. 한 예로 작년 민주당의 국회 본회의장 점거와 올해 예산결산위원회 회의장 점거 농성은 대화와 토론이라는 민주주의에 의한 의사결정에 이르는 과정을 방해하는 반민주적인 행동이자 ‘소수’ 독재의 행동이었다. 86명의 의원을 가진 정당이 169명이라는 의회 다수를 점하는 정당을 이기는, 즉 소수 의사가 다수 의사를 압도하는 정치였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민주주의 정치의 다수결 원칙을 회복하고, 무원칙과 무책임의 정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첫째, 국민과 보수언론이 힘을 모아 의사진행 방해행위를 엄히 처벌하도록 규정을 만들도록 국회의 정치개혁특위를 압박해야 한다. 국회의원들은 정당의 지시에 따른 자신들을 처벌하는 규정을 절대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국회의장은 외부 인사들로 구성된 정치개혁특위에서 안(案)을 만들도록 하고 통과시켜야 한다. 국회 정상화를 위하여 국민과 언론과 국회의장의 역할이 중요하다.

둘째, 국민은 국회의원들에게 법안심의와 예산심의가 의원의 빼앗길 수 없는 본연의 의무임을 주지시켜야 한다. 국회의원의 본연의 기능이란 국민의 자유를 최소한으로 제약하는 법을 만드는 것과 합리적인 예산으로 국민과 기업의 부담을 줄이고 행정부를 견제하는 것임을 주지시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12월 31일 한나라당이 단독으로 새해 예산안을 통과시켰다고 하더라도 이미 국회는 12월 2일이라는 법정시한을 넘겨 법을 어겼다. 과거 국회는 12월 2일 예산심의를 넘기면 큰 일이 나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이번 국회는 12월을 넘겨 정부가 준예산 편성을 준비해도 미안한 기색조차 없다. 앞으로 예산이 법정시한 내에 통과되지 않으면 국회의원 세비와 활동비부터 지급하지 않도록 국민과 언론이 요구하고 관철시켜야 한다.

셋째, 국회의장이 스스로 국회의 중심을 잡아 주어야 한다. 모든 회의의 의장(議長)의 역할은 의사 진행을 원만히 하는 것이다. 즉 대립된 의견을 청취하고 결정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회의장의 질서유지는 기본이다. 하지만 김형오 국회의장은 회의장 질서유지 내지는 회의장 확보에 있어서는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작년의 민주당을 포함한 야당의 본회의장 점거 책임과 올해의 민주당의 예결위 회의장의 점거 책임을 한나라당이 질 것이 아니다. 의사장 질서유지와 확보는 당연히 국회의장과 그의 지휘를 받는 사무총장의 임무이다. 또한 김형오 국회의장은 다른 나라에 비해 의장의 권한이 없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국회의장이 가진 직권상정의 권한을 적절히 이용하면 된다. 올해의 경우도 민주당에게 회의장을 점거하는 경우에는 무조건 직권 상정하겠다는 무기로 협상장에 나오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직권상정은 없다는 약속만 되풀이하여 민주당으로 하여금 협상에 미온적이게 하였다. 이제 역사상 그리고 전 세계에 유래가 없는 의장의 의장석 점거농성으로 국회의장의 권위를 추락시켰다.

미디어법 파동, 세종시 논란, 새해 예산안 심의 파행 등 그 근원은 민주주의 정치에서 다수결에 의한 의사결정 절차가 무시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다수결에 이르기 위한 심의와 토론이 소수의 회의장 점거 농성 때문에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소수 야당의 폭력 사용에 의해 심의와 토론의 과정이 없어지고 타협의 기회가 사라져 버리며 결국에는 다수 여당의 단독처리가 일상화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국회가 소수당의 방해로 정당한 의사결정에 이르지 못하는 사태가 계속된다면 국회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선거에서 엄중한 국민의 심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민은 오래 전부터 정당을 불신하고 국회 무용론을 제기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올해는 정치권이 호랑이의 기운을 받아 원칙 있고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기를 기대한다.

김인영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 iykim@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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